당신은 혹시 철학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미술, 음악, 수학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철학만큼은 예외다. 사람들은 철학을 떠올릴 때 ‘난해한 소리’ 정도의 모호한 인상만을 갖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맥스웰의 전자기학 방정식이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각각 ‘과학’과 ‘문학’이라고 명확히 분류한다.
그런데 왜 철학만큼은 그 정체성조차 모호한 것일까?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는 말년에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할 때가 우리에게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이는 놀랍게도 수천 년간 철학을 해온 철학자들조차 철학에 대한 명확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철학의 어원을 따져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철학을 뜻하는 ‘필로소피’는 고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에서 나왔다. ‘사랑하다’는 뜻의 ‘필로’와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가 합쳐진 말이다. 즉,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무엇에 대한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일까?
이 빈칸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이 들어갈 수 있다. 첫째는 정치학, 물리학, 수학 등 모든 학문에 대한 사랑, 즉 만학에 대한 욕구다. 둘째는 근원적 앎, 즉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지혜에 대한 탐구다. 이 두 방향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을 떠올려보자.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플라톤은 철학 그 자체로 여겨진다. 그런데 플라톤이 다룬 주제들을 살펴보면 놀랍다. 파이도에서는 영혼 불멸을, 향연에서는 아름다움을, 메논에서는 교육방법을 논했다. 또한 티마이오스에서는 우주 창조론을, 크리톤에서는 법의 정의를, 고르기아스에서는 수사학과 미덕을, 그리고 대표작 국가에서는 정치 체제 전반을 다뤘다.
이외에도 플라톤은 대략 26편으로 추정되는 대화편들을 통해 문화, 역사, 군사학, 심리학, 경제학, 사회학, 천문학, 물리학, 심지어 의학까지 건드렸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자신이 살았던 기원전 5세기경에 거의 모든 학문을 총괄하려 했던 것이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시도를, 플라톤은 왜 했을까?
여기에는 철학의 두 번째 요소인 ‘근원적 앎’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 그리스어로 근원을 뜻하는 말은 ‘아르케’다. 이 아르케적 욕망은 그 증명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만학적 탐구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말로 이 세계의 근원이 되는 것이 있다면,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분야들에서 그 공통된 근원적 요소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경우, 현실의 모든 것들은 이데아라는 본질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봤다. 따라서 모든 대화편에서 그 주제가 되는 분야의 이데아, 즉 본질을 찾아내려 했다. 정의의 본질, 용기의 본질, 우정의 본질 등등. 플라톤의 만학적 탐구는 곧 현실이 이데아로 이루어져 있다는 아르케 증명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철학은 전문적인 학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철학은 본인이 생각한 아르케를 바탕으로 흩어진 전문 지식들을 연결하는 관계의 학문이며, 그런 틀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런 작업을 ‘별자리’라고 표현했다. 즉, 흩어진 별들 사이에서 성좌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자는 전문가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각 분야의 전문화가 극도로 진행된 상황을 생각해보라. 경영학과 교수가 미생물학과 심사에 참석하거나, 실용음악과 교수가 기계공학과 교수 임용 심사에 참석하는 경우는 없다. 전문 지식이라는 것은 각 분야의 지식을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이고, 그 전문성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철학은 어떤가? 세계관이라니. 그 증명 방식 자체가 정확히 반전문가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현실을 총괄할 순 없잖은가. 철학자들은 플라톤처럼 아르케를 증명하기 위해 분과 학문들을 한낱 증명수단으로 격하시키면서 자기만의 세계관을 구축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조적 삶, 즉 테오리아를 철학자의 바람직한 태도로 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철학을 제대로 하려면 분과 학문들을 훨씬 더 높은 위치에서 조망할 수 있는 초인간적 지성을 필요로 하므로, 유독 철학계에서 천재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칸트, 헤겔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철학사에 오른 그 철학자들이 정말로 천재인 것이 아니라, 천재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비인간이 아니고서야 철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물어서, 19세기 자연철학을 정리했던 헤겔이 동시대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만큼 생물학에 대해 알았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 이런 한계를 은폐하기 위해서는 천재라는 신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런 일은 분과 학문들이 덜 분화되고 덜 발달했던 전근대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현재 인문학계에서 독보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미셸 푸코의 경우, 본인이 아르케라고 봤던 권력 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중세 문화부터 시작해서 법학, 정신의학, 정신분석,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경제사까지 총동원하고 있다.
그러니 철학이란 전문가 집단의 대학 내 이단인 셈이다. 증명 과정의 모순 때문에 철학은 전문적인 학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전문가가 아니라 ‘현자’라고 하는 두루뭉술한 이미지로 포착되어 온 것이다.
이쯤에서 처음에 던졌던 질문들 – 철학은 왜 직관적인 이미지가 없을까, 혹은 철학자들마다 왜 철학에 대한 정의가 다를까 – 이 얼추 해결된다. 한번 생각해보라. 자기가 아르케라고 생각하는 것을 찾았는데, 다른 철학들은 뭐가 되겠는가? 오류이고 거짓이다. 다른 철학들은 자신이 찾은 진리에 의해 교정되거나 사라져야 할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이건 마치 지적 설계론 논쟁 같은 것이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의 갈등이 존재할 수 있지만, 과학의 영역에서 창조론은 인정되지 않지 않는가. 그래서 과학사에서 창조론은 진화론이 깨뜨린 구시대적 믿음이라고 아주 짧게 언급되는 것으로 끝난다. 만일 창조론과 진화론이 마치 대등한 이론인 것처럼 기술한 과학 서적이 편찬된다면, 그 글쓴이는 곧장 과학계에서 퇴출당한다.
철학도 이와 마찬가지다. 다만 과학계에 비해 상대를 쳐내려는 빈도가 너무 잦을 뿐이다. 거듭 말하건대, 철학은 철학자들마다 다시 정의되어 왔으니까. 뭐랄까, 전투적인 콩가루 집안이랄까.
또한 그렇다면 철학이란 ‘근원에 대한 탐구 및 그 증명 과정에서 촉발되는 세계관 구축 작업’ 정도로 정의될 수 있겠는데, 여기에 대한 직관적인 이미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근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딱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철학을 정의한다고 해서 딱히 해결되는 건 없다. 사실 이런 정의는 공허하다. 왜냐하면 사람들, 좀 더 정확히는 철학적 성향을 가진 몇몇이 그러한 철학을 하는 이유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더 깊은 질문에 직면한다. 철학자들은 왜 철학을 하는 걸까? 왜 이렇게 아르케를 찾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갈증, 즉 자신이 누구이며 이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절절한 물음에서 비롯된다.
붓다가 궁전을 떠나 진리를 찾아 나선 것도,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도, 결국은 이 같은 근원적 갈증에서 나온 것이다. 철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하려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충동이다.
따라서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삶 그 자체와 맞닿아 있는 실존적 탐구이며, 깨달음을 향한 영혼의 여정이다. 2500년간 철학자들이 끝없이 논쟁해온 것은, 각자가 찾은 진리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길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당신도 일상 속에서 작은 철학자가 되어보라.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보고, 저녁에 잠들기 전 “오늘 하루 어떤 의미가 있었나?”라고 성찰해보라. 그것이 바로 2500년 전 소크라테스가 시작했던 그 여정의 첫걸음이다.
